역사상 가장 많이 알려진 클래식 음악가이며 아름답고 우와하며 환상적인 음악을 전해준 천재 음악가의 대명사 모차르트 입니다. 짧은 생애에 많은 작곡을 남겼으며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나 너무나 빠른 천재성이 그를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게 한것 또한 사실인 안타까운 작곡가이자 연주자 입니다.
단명한 천재 작곡가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며 음악가, 천재 음악가, 악동 음악가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남긴 단명한 천재 클래식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입니다. 사실 실제 이름은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Wolfgang Gottlieb Mozart)이나 사후에 그의 아내에 의해서 출판 목적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신동 모차르트
영화에서는 단편적이고 그의 천재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화려함과 즐거움만을 보여주는 이야기 전개와 (영화이기 때문에) 그와 살리에르(당시 유명 작곡가)에 암투등을 요소로 넣어서 만들었으나 사실 실제 모차르트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1756년) 모차르트는 음악가인 부모밑에서 연주와 음악을 배웠으며 신동으로 불리 듯 5살에 벌써 작곡을 시작하였고 부친이 사방에 자랑했기 때문에 찾아온 사람들이 직접 연주를 확인하고 놀랐다고 합니다.(물론 아들의 흥얼 거림이나 즉흥적 연주를 아버지가 받아 쓴 악보임)
1762년부터 10년간 온 가족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를 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큰 이득이 되었고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로 더욱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음악가와 만남
파리에서 당대의 쳄벌로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요한 쇼베르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우리가 아는 작곡가 아들)등에게 작곡법을 배우고 유명한 카스트라토(미성의 중성화된 가수) 조반니 만추올리에게 성악을 배우는 등 많은 이들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여행에 가장 큰 걸림돌중 하나는 바로 전염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러 이유로 환경이 좋지 못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풍토병으로, 빈에서는 전염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시다시피 당시 이와 같은 병들로 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1770년 이탈리아에서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밀라노에서 최초의 오페라 "폰트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87)를 초연하였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모차르트는 어려움을 겪는데, 워낙 대본이 엉망으로 만들어져서 스토리의 개연성과 등장인물이 일치되지 않는 등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어서 오페라로 만드는데 힘들었다고 합니다.(이후 대본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안정된 직업을 얻기 원했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공을 바탕으로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의 궁정 음악가로 고용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당시 원만하던 그의 부인에 반대로 취업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가난과 성공 그리고 낭비벽
모차르트의 첫사랑
안정된 직장을 위해서 만하임의 오래된 교향악단에 들어가려 하던 중에 소프라노 가수 데뷔를 준비 중이던 17세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고 청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와 직장의 사임으로 많은 빛을 지고 있었으며 아들에 출세에 목을 매는 아버지로 인해서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이후에 알로이지아 베버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가난한 청년 모차르트
당시 시대상 작은 마을에서는 대주교의 영향이 컸는데 새로운 대주교는 음악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는 이였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음악의 발전에 큰 애로 사항이 되었습니다. 궁정 극장을 폐쇄하거나 연봉을 줄이거나 아예 모차르트의 재능을 무시했습니다.
이에 사방으로 안정된 직장 찾기가 시작되었고(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파리에서 구직 활동과 음악 선생, 작곡 알바등을 이어 나갔으나 결국 같이 동반했던 어머니만 급사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결국 직장을 얻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고 합니다.
돌아온 이후에도 대주교의 무시와 열악한 환경을 견디던 모차르트는 이때에 의뢰로 만든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신성제국의 요제프 2세 대관식에서 연주할 기회를 대주교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자 사표를 제출하고 말싸움이 벌어지고 대주교는 이를 거부하며 비서를 시켜 엉덩이를 차서 내쫓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성공과 단명
프리랜서 작곡가 모차르트의 낭비벽
이후 아버지와 사이는 벌어지고 잘츠부르크에 질린 모차르트는 빈으로 떠나게 되고 프리랜서 작곡가로 길을 들어섭니다. 그의 첫사랑이었던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의 숙박시설에서 머물었으며 이때 이 집안의 두 소녀와 재미나게 지냈는데 그중에 콘스탄체와 결국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어느 정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뛰어난 연주가며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제자도 생겼으며 공연마다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상당히 고액의 돈을 벌었으며 넉넉한 삶이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사치와 겉치레, 도박등에 빠져서 돈을 탕진했습니다. 더욱이 아내인 콘스탄체도 마찬가지로 사치와 낭비벽이 심해서 돈이 모이질 않았습니다. (뭉치돈을 들여서 파티를 자주 열었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듯 이때에 황실에서 그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작곡이나 연주를 의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돈 마저도 낭비벽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많은 빛을 졌다고 합니다.
단명한 작곡가 모차르트
다행히도 1789년부터 유럽 전역으로 연주 여행과 작곡을 했는데 이 덕분에 빛이 조금이나마 줄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작곡 활동도 이어 나갔습니다.(또한 일부 고정적인 후원으로 자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1791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e di Tito)를 상연했는데 이때부터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 와중에 자신의 마지막이 될 작품 마술 피리를 초연했으며 대단한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에서도 이미 거액을 받은 의뢰 작곡품(진혼곡)을 작곡해야 했는데 고열과 설사 구토등으로 쓰러지게 되었으며 주치의에게 치료도 받았으나 결국 1791년 12월 5일 35세 나이에 사망합니다. 결국 완성되지 못안 진혼곡은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사후는 아름답지 못했는데 귀족의 묘지가 아닌 일반 서민의 공동 묘지에 몇몇 음악가가 참가한 가운데 뭍혔다고 전해집니다.(물론 시간이 흐른 후에 발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 하게 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재정적 어려움으로 아내인 코스탄체의 의뢰에 의해서 모차르트의 제자인 쥐 마이어가 완성하여 악보 표지에 모차르트의 사인을 위조해서 모차르트의 작품을 일부 납품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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